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허her는 이번 아카데미 주요작 중 내 마음을 가장 끌었던 작품이자,
서랍 깊숙이 처박혀 위태위태한 채로 낡아가고 있던 '내 인생 다섯 편의 영화'자리를 노리고 있는 위험한 작품이기도 하다.
호아킨 피닉스, 그러니까 힘him이자 시어도어인 그의 클로즈업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그가 편지를 읽는 짧은 순간을 이용하여 관객에게도 그를ㅡ어쩌면 온전히,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약간의 미래, 이미 서로를 위해 짧막한 글귀조차 쓸 겨를 없는 이들을 위해 대리 손편지 회사가 생겨난 시점.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해 세상 그 어떤 시보다 아름다운 편지를 읊는, 곱슬머리의 핼쑥한 남자.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다.
한 남자가 OS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들은 '진짜' 사랑을 한다.
인공지능 OS가 태어나는 그 약간의 미래는 지금, 현재 도시의 모습과 특별한 차이랄 게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지가 낀 듯 뿌연 거리를 홀로 걸어다니며, 블루투스 이어폰을 통해 정보를 얻고 지운다.
여기서 사물통신이니 웨어러블 디바이스니 구구절절 떠들고 싶지만, carax가 질색할 것이므로 패스.
그럴 때가 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마구 토하고 싶을 때가.
어쩌면 그는 그녀가 OS라, 즉 인간이 아니라서 처음부터 그의 모든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고, 덕분에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즉 처음부터 시어도어는 사만다가 인간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었다.
시어도어는 본인이 전처 캐서린과의ㅡ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ㅡ사랑과 결혼 생활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겪어봤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의 새로운 감정은 없을 거라 여긴다.
언제나 똑같은 일상, 똑같은 거리,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온 세상이 신기하고, 모든 것이 새롭고 궁금한 사만다는
먼지빛이었던 그의 삶을 알록달록 물들인다.
본인 말마따라 매 시간 매 초마다 진화해가는 그녀는
시어도어를 통해 감정을 습득해가고,
당연하지만ㅡ인간과 삶의 속도가 다를 수 밖에 없는 탓에
차마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는 본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기어코는
떠난다.
순수하게 사랑만 좇아 사랑을 햇던 시어도어는
전처 캐서린의 말로 인해 스스로의 감정을 의심하고, 큰 함정에 빠진다.
그리고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여기서 나타난다.
시어도어와 사만다는 모두 스스로가 경험한 상처와 사랑이 '진짜'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진짜인지,
만질 수도, 심지어 볼 수도 없는 이 사람ㅡ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ㅡ이 내 사랑인지.
에이미는 말한다.
좆까,
라고.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건 아주 잠깐이고,
이 잠깐동안 난 스스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좆까ㅡ두 번이나 써넣은 건 단순히 내가 이 대사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랄까
장황하게, 정체성을 잃은 채로 줄줄 써내려오다가
기승전 좆까고 사랑이나 해, 가 되는 느낌이네.
나쁘지 않다.
애초에 블로그 첫 포스트로 허를 고른 건 나였으나,
사실 참 버겁다. 이 영환.
내 서랍 컬렉션에 굳건히 자리잡은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이 몇몇 장면만 떠올려도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리는 영화라면,
허는 목까지 차오른 울음이 차마 터지지 못하고 울컥울컥 고인 영화라고 할까. 시원하게 엉엉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는.
그래서 시작부터 끝까지 울지 못한 채로 영화는 후다닥 종적을 감추고 만다.
심지어는 Arcade Fire의 사운드트랙마저도 감정을 터뜨릴 듯 말듯 긴장감을 이어가다 끝난다.
아, 이 소름끼칠 정도로 치밀한 사람.
내겐 2014년 1분기 최고의 영화이자,
크나큰 해일이 닥치지 않는 한 2014년 최고의 영화일 듯한 작품.
조만간 서랍 정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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