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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a/de cinéma

The Village

나는 수학을 좋아했고,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이과생이 되었다.

열 여덟 여름의 한 때에는 오로지 미적분에 빠져 새벽 3-4시까지 문제집을 들췄으며, 그 때의 여파로 무시무시했던 대학교 공업수학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아직도.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꽤 수학적인 인간이 되어 있다.

 

수학자들은 자신을 제외한 양의 약수의 합으로 표현되는 양의 정수를 완전수라고 표현했으며, 더 이상 떨어지거나 덧붙여질 것 없는 공식이나 그래프를 '아릅답다'고 칭송했다.

 

그렇지, 수학자들이란 마냥 변태나 다름없다.

 

나의 수학적 성향은 때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도 발휘되는데,

이를 테면ㅡ추리물이라곤 손톱에도 안대는 내가 영국드라마 셜록에 빠져선 허우적대면서도 한 회의 초반부터 나오는 모든 증거들을 손 안에 쥐고 있다가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ㅡ아니나 다를까ㅡ재조명되는 순간,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때문에 당연히 뒷통수를 후려맞는 배신의 쾌감따윈 내게 없다.

 

덩달아 반전영화를 보면서도ㅡ당연히ㅡ반전을 느끼지 못한다. 식스센스 이후 무수히 많은 반전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도 식스센스 이후 그 영화들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아이덴티티는 너무 뻔해서 지루했을 정도니까.

 

최근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먹인 건 아마 <원 데이>. 하. 이런 게 반전영화지. 는 뭐, 뻘소리고,

<내가 사는 피부>였다.

 

어쨌거나 내가 빌리지를 반전영화로 정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찾으려고 검색한 순간 튀어나오는 반전어쩌고. 결말어쩌고 하는 연관 키워드에 변하고자 함이다.

 

나는 이 영화가 오히려 지독한 멜로영화라고, 생각한다.

 

루셔스가 마을 원로들에게 자신이 쓴 편지를 읊는 초반부,

그의 입에서 thought 라는 단어가 내뱉어지는 순간ㅡ씨어도어가 끼어들었고, 이제는 호아킨 피닉스한테 진짜로, 빠져버린거라 심지어는 마스터 속 그마저도 사랑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게 마치 연애편지이며,

그가 아이비에게 고백하는 순간은 심지어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들, 이고 뭐고 당장 침대로 달려가라고 외치고 싶었다니까.

 

 

이미 10년이나 지나버린 이 영화에 대한 평단의 반응이야 무엇이든 상관 없다. 예전부터 이런 마음으로 영화를 봤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서야.

 

우선, 오프닝 시퀀스부터 인상적이었다. 메마른 나뭇가지들과 색채라곤 없는 하늘. 카메라는 그 사이를 어지럽게 비틀거리며 음산함을 마구 뿜어대고, 꽤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다.

 

아, 그러고보니 <파라노이드 파크>도 하늘을 먼저 비췄던가. 하늘이란, 강렬하구나.

 

영화 속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 아이비가 등장하는데 이 매력적인 캐릭터는 웬만한 남자보다 용감한데다 우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대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색깔.

영화에서 색은 꽤 의미있는 역할을 한다.

붉은색은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들이 좋아하는 색이자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색으로 묘사되고, 반대로 노란색은 안전한 색으로 상징된다.

또한 아이비는 루셔스를 색으로 인식하는데ㅡ끝까지 어떤 색인지 말해주지 않지만ㅡ아마 붉은색이리라 예상된다ㅡ그녀의 아버지 역시도. 이 때의 붉은색은 아마 사랑이겠지.

 

반전은 바깥 마을에서 각기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 트라우마를 가진 장로들이 고립된 마을을 짓고, 더 이상 소중한 이들이 끔찍한 세상 속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괴물의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라는 이야기인데, 여간 엉성스럽지가 않다. 특히 괴물의 모습 자체가.

 

그래서 이 영화가 더 마음에 들었다. 갇혀있는 그들의 순수함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어둠 속으로 손을 뻗은 그녀가, 숲 속에 들어가 꽃을 꺾다 괴물을 마주하곤 빠른 걸음으로 뒤돌아 나오던 루셔스가, 너무너무 사랑스러웠다.

 

결론.

빌리지는 꽤나 그로테스크하고, 연극적 요소가 강한 멜로영화,

라고 정리해본다.

 

ps. 아마 carax가 아니었다면 영영 보지 못했을지 모르는 영화였어서, thanks to 하고 싶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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