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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구조적인 기분 나쁨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1. 16. 20:48

 

 

기분이 몹시 나빴다. 홍상수 영화 보고 기분 나빠지는 이유는 빤하다. 어떻게든 예쁜 여자랑 한번 자보려는 남자들, 불륜이 난무한 설정에 1차적으로 진절머리가 나고, 달변에 홀라당 굴할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엔 또 그런 남자들을 조종하는 듯한 여자 캐릭터들의 당참에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영화가 짜증날 정도로 현실적이라 발개벗겨진 것처럼 얼굴이 후끈거리는데, 인물의 솔직한 감정을 담아낸 순간들때문에 그 자리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홍상수의 영화는 나에게 그런 애증의 존재다. 아니 솔직히 애 3 : 증 7 정도.

 

이번 영화의 최초의 감상은 마냥 기분 나쁨이었다. 가장 싫었던 점은 홍상수의 선택과 배열. 1부의 함춘수(정재영)와 2부의 함춘수에 변화를 주어 이야기를 나눈다. 홍상수가 선택한 그 '변화'는 간단히 말해 인물의 '솔직함'이다. 1부의 함춘수는 윤희정(김민희)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 2부의 함춘수는 윤희정에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닐지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1부의 함춘수는 윤희정의 그림을 보고 감언이설을 하지만, 2부의 함춘수는 날카롭고 냉정한 조언을 건네는, 그런 식.


이야기를 따라가보면 그렇다. 1부의 함춘수는 자신의 기혼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진 않았으나) 타인의 입을 통해 윤희정이 듣게 한다. 함춘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윤희정이 크게 상처 받고 영화는 종료된다. 2부에서는 함춘수의 기혼 사실이 전개상 빨리 밝혀진다. 그 이후의 전개에서 난 화가나기 시작했다. 2부의 윤희정은 함춘수의 기혼사실을 알고 나서도 어느 순간부터 함춘수에게 더 빠져든다. 엔딩, 함춘수의 영화 상영회에 온 윤희정이 극장 안에서 함춘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정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좋다고 개처럼 함춘수한테 매달려있는 윤희정. 함춘수는 그런 윤희정을 두고 세상에서 제일 정중한 사람처럼 극장 밖으로 나간다. 이후 윤희정의 썪을 것 같은 얼굴 롱테이크. 그 다음이 더 가관이다. 함춘수의 영화를 보고 나온 윤희정의 맑은 표정, 흰 눈 속으로 걸어가는 뒷모습. 결국 "마누라가 있다고 차라리 일찍 말하는게 좋습니다", 라고 말하는 영화같았다면 편협한 시각과 덜떨어진 판단이라고 비난받을지라도 그렇게 쓰겠다. 내 마음이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할 수록 기분이 더러운건 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인물과 이야기에 어떠한 변화를 주어 다른 이야기를 만든 구조 안에서 변화의 발화는 함춘수에게만 주어지고, 윤희정의 액션은 1부와 2부 모두 함춘수의 액션에 대한 리액션만으로 읽혀진다는 지점.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그나마 위안을 얻었던, 여자 캐릭터들의 능동적이고 (누구의 표현을 빌려오자면)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바늘로 빵 터뜨리는 듯 주의를 환기시키는 주체적 역할을 한번도 해내지 못하는, 그런 설정이 전혀 없는 캐릭터가 이 윤희정이란 인물인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와 미친듯이 싸우며 깨달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가장 기분 나빴던 포인트가 바로 이거였다. 다음 영화에서도 이렇게 여자 캐릭터를 만들어버리면 증을 좀 더 늘릴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김민희가 홍상수의 다른 영화의 여자 배우들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