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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리뷰가 아닌, <엘리펀트>를 본 나에 대한 리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6. 2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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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비롯한 모든 연출이 하려는 이야기와 사무치도록 잘 어울리는 영화를 볼 때, 내 몸의 기분좋은 무기력함과 생각의 떠돔을 어떻게 주체해야할지 모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후, 결국 가슴 속 깊게 간직하리라 온갖 다짐을 하게되는 일련의 과정. 즉 하나의 '영화'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 그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지금 내가 하는 이 짓거리.

 

모르겠다. 요즘 하도 나의 영화 사랑에 메말라있던 터라, 더 깊숙히 들어온 것일지도. 대체 영화란 무엇인가. 정말이지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는 의미가 없다는 소리가 맞나. 뤼미에르와 멜리에스 사이에서 했던 영화의 근원에 대한 고민, 고다르에 너무 지쳐 감히 화가 났던 시간들. 엉켜있던 생각들이 대체로 해결됐을줄 알았지만, 터무니없는 자신감이었던 것 같다. 말도 안되는 기대였던 것 같다. 하나도 모르겠다. 대체 이 요물같은, 보물같은, 이 죽어있는 생명체는 가끔씩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고 만다.

 

내 오늘은 그냥 씨부리지만, 다시 한번 더 보고나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겠다.

 

2011.6.11. 구스 반 산트 <엘리펀트>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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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링크>> http://blog.naver.com/innocent_u/100130380732






3년전, 엘리펀트를 처음 보고, 온몸이 전율에 차 올라 저런 메모를 남겼다. 정신이 주체가 안된다는 핑계로, "나중에 영화 다시보고 자세히 써야지"라며 어김없이 질러놨었고, (내가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 ㅋㅋ) 얼마전 엘리펀트를 다시 보며 의외로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두번 보면 감동이 더 클거라는 당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인지 뭔지. 헌데 이 메모가 떠올라 읽자마자, 1. 낯짝이 벌게지며 부끄러웠고(옛날 글을 읽는건 언제나 민망하고 괴로운 일이다) 2.  내가 그당시 어째서 엘리펀트의 아우라에 휘둘렸는지 문득 떠오르더라. 그래서 그 얘길 좀 써볼까한다. 고로, 엘리펀트에 대한 리뷰가 아닌, 엘리펀트를 봤던 나에 대한 리뷰다.



영화의 역사에서 영화의 근원, 시작을 이야기할때 거론되는 사람은 뤼미에르 형제와 조르주 멜리에스다. (다 까먹었지만 되짚어본다-틀린 정보일 가능성 높음) 

1895년 뤼메이르 형제가 세상에 처음 선보인 영화, <열차의 도착>은 달려오는 열차가 멈추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다. 뤼미에르는 이어 아이가 웃는 모습, 군중들이 퇴근하는 모습과 같은 '실제 현상'을 필름에 담아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흰 종이떼기 위에 실제 모습이 똑같이 구현된다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즐거움 그 자체였다.(열차의 도착을 보고 사람들이 열차에 치일까봐 다 도망쳤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매우 유명하다)

몇년 후 연출이 깃든 영화가 만들어진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나라 여행>이 탄생했다. 짜여진 각본과 배우와 세트와 연출이 담긴 픽션이다. 최근 스콜세지의 휴고를 통해 멜리에스와 달나라 여행에 대해 알고 있는 관객들이 많을 것이다. 스콜세지의 영화 사랑과, 오마주, 눈물겨운 찬사가 담겨있다.

영화는 그렇게 크게 두 줄기로 나뉘어 그간 100년 역사를 써왔다고 볼 수 있다. 픽션과 논픽션, 물론 픽션과 팩트가 합쳐진 팩션도 있다. 우리가 극장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픽션 영화들이며, 논픽션이라함은 다큐멘터리를 일컫는다고 해도, 크게 틀린 지칭은 아닐 것이다. 픽션이니 논픽션이니, 이 단어들의 정의와 정확한 쓰임새는 사실 잘 모른다. 대충 이런 것들이 있다~ 이렇게 구분이 되고, 구분되는 근원엔 저러한 역사가 있다~~~는 것.

어쨌거나 나는 다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년에 다큐멘터리를 한 편 볼까 말까할 정도로 편식이 심하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 성향과 결부되기때문이지,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위대함을 절대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나의 꿈은 '최고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 나아가 (내가) 그 '최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였다. (뜬금없는 꿈 공개) 그렇다보니 영화를 접할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 역시 '이야기'이고, 화자가 영화 속에서 그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느냐를 지켜보며, 좋아하는 감독이 생기기도, 접하고 싶지 않은 감독이 생기기도 한다. 그 이야기라함은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이야기와는 다른, 허구의 인물(창조된 인물)과 짜여진 각본(창조된 각본)으로 빚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편협적인) 영화사랑을 쌓아가던 중, 대학때 무용을 배우게 된다.(절대 직접 하는 무용을 상상하면 아니됨) 고전무용에서부터 현대무용까지 무용의 역사를 훑는 수업이였다. 그때 난 엄청나게 심각한 슬럼프에 빠진다. 무용이야 말로, 내가 찾던 순수 예술, 진정한 예술이 아닐까 하는 (기상천외한) 의심 때문이였다. 특히 강의가 현대무용으로 갈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피나 바우시나 매튜 본의 춤을 볼때면 수업 도중에 강의실을 뛰쳐 나가 춤을 추고싶을 때도 있었다. 당시 나에게 무용은, 그 어떤 도구와 소품없이, 내 한 몸 바쳐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예술이였다. (몸이 다 썪고 뻣뻣하지만) 다 때려치고 처음부터 배워볼까? 하는 미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게 아니였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존재했다. 카메라를 포함한 무한한 경우의 수가 존재했다. 괜히 그당시엔 그런 모든것들이 매우 불순하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내가 직접 단편영화를 만들어보며(- _-) 영화는 '꾸며진', '순수치 못한' 예술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고, 영화를 마주하는게 꺼려지는 주기가 자주 찾아왔다. 설상가상으로 픽션 영화만을 선호하고, 다큐멘터리를 외면하는 내 자신을 모른척 하는 행동들이 점점 아니꼽기 시작했다.


그쯤 <엘리펀트>를 봤던거다. 다 지루하고 뻔하고 헛헛했던 영화들 속에서 엘리펀트는 내가 가지고 있던 영화에 대한 소심한 경멸을 잠재워버린 영화였다.

첫째, 영화의 근원은 뤼미에르(다큐멘터리)인가 멜리에스(픽션)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던 나에게 과연 그게 의미있는 짓인지를 되물어주었고,
둘째,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장치들이 예술의 본질을 불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나 혼자만의) 고민을 실컷 비웃어줬다.

그게 엘리펀트다.





러닝타임 81분, 4:3 비율의 이 영화는 90년대 후반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다룬 이야기다. 히치콕의 <로프>를 방불케하는 롱테이크, 인물들의 동선이 만들어내는 교차와 그것이 하나의 '순간'임을 드러내는 연출이 유난히 돋보이는 영화다. 

이 영화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류'의 영화가 아니였다. 실화지만 다큐에 가까운, 하지만 극영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굉장히 모호한 경계에 서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그렇게 (행복감에 흠뻑젖어) 괴로웠던 이유는, 그간 영화를 통해 내 속에서 움직였던 감동의 규모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부피의 감동이,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밀려왔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창작물의 틀을 넘어 서, 바로 내가 서있는 이 현실 옆에 가까이 다가와있는 하나의 예술을 접하는 기분이였다. (뭔소린하는건지 모르겠다?)

+ 대학시절, 영화는 현실이냐? 환상이냐? 로 04학번 선배와 밤새 싸우다가 끝내 패배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이젠 내 의견(영화는 현실이다)을 선배의 머릿통에 관철시킬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였다.

<엘리펀트>는, '현실'과 가까웠다. (현실이다, 라고 말하고싶지만 그런 표현은 누군가에겐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있기에 삼가) 내가 살면서 봐왔던 영화들 중 가장 현실에 가까운 영화였다. 감독은 실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다 놓은 듯했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크게 세가지였는데, 감히 삼무(三無)라고 일컫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첫째 캐릭터가 없었고, 둘째 서사가 없었으며, 셋째 편집이 없었다.

캐릭터. 꽤 여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총에 맞아죽는 역할 또는 맞아죽진 않는 역할로 나뉠 뿐, 극의 전개에 있어 특별한 미션이 주어진 캐릭터가 없다. 누구 하나 어느 맥락에서 치고 나와야 할 의무가 없었고, 의미있는 대사를 읊을 필요가 없었다. 학생들은 평소의 모습 대로 카메라의 뒤에서, 옆에서, 혹은 카메라가 없는 어느 곳에서 '있어'주면 됐다. 카메라는 그들의 모습을 그저 '담을' 뿐이였고, 굉장히 자연스러운 무빙을 보여주었다. 총을 들게 되는 학생과 총에 맞는 학생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도 않는다. 총기 난사한 학생들이, 어렸을적 어떤 트라우마를 겪고 학교에서 어떻게 따돌림을 받았는지, 살인의 동기부여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타당성(또는 부당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서사가 없다는 얘기와도 자연스레 연결된다. <엘리펀트>에선 흔히 얘기하는 기승전결을 짚어내기 어렵다.

그리고, 편집이 없었다. 사실 이게 제일 말 안되는 근거다. 자고로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라고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편집'이란, <전함포템킨>의 오뎃사 계단 장면에 쓰이는 편집같은 편집이다. 1컷-밀려오는 적군들 풀쇼트, 2컷-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아이, 3컷-겁에 질린 어머니의 얼굴, 4컷-밀려오는 적군 클로즈업, 5컷-혼자 남겨진 아이 클로즈업, 울음소리, 6컷-어머니의 얼굴 익스트림 클로즈업 /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며 아이가 혼자 남겨져서 어쩜 좋지, 저 어머니는 얼마나 초조할까, 적군이 몰려오는데 큰일이네, 와 같은 세가지 상황을 종합하여 받아들인다. 이런 식의 편집, 이런식의 상황 전달을 이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다는 소리다. 꾸밈이 없었다. 실제와 최대한 가까운 모습을 영화에 담기위한 감독의 의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였다.


영화 속에 현실의 메세지가 이정도까지 담길 수 있다면, 난 영화 탄생의 과정을 존중할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화라는 예술에 순수성을 들이밀며 괜히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져버렸다. 또한, 영화와 관객 사이에 카메라가 있는 이상, 영화 앞에 앉아있는 관객들은 영화를 믿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영화감상이라면 의무감? 개나줘버려다. 머릿 속 비우러 극장 가는데 무슨 개소리냐 싶을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앞서 말했듯 이러저러한 역사가 있고, (남들 눈엔 우스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영화 앞에서 의무감이 필요하며, 그렇기때문에 영화를 고를때 심각할정도로 신중한 태도, 내 신념을 보호해주고픈 방어태세를 취하는 것 같다.

또 하나, 구스 반 산트가 뤼미에르와 멜리에스를 반반씩 빙의받아 만든 것만 같은 <엘리펀트>를 보고 난 이상,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근원이 누구였는지를, 누가 더 위대한 것인지를 굳이 나누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의미없는 선택지였고, 스스로에 대한 강요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밀크>니, 최근 <프라미스드 랜드>를 보며 구스 반 산트는 정말 천재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