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존즈, 허<Her>
우리가 <허>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그 이유는 곧 스파이크 존즈가 <허>를 새상에 내놓은 이유와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감독의 의도를 관객이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영화라는, 간단한 얘기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감독과 관객 사이에 발생하는 1차적인 의사소통이 <허>에서 이뤄진다. 정말 기본적인 단계이기 때문에, 조금은 하찮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꽤 쉽지 않은 과정이다. 우리는 극장을 박차고 나가며 '그래서 어쩌라는거야?',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는게 뭐지?'하고 투덜거리는 일이 자주있기도 하고, 한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줄줄이 붙어 논쟁의 논쟁이 필요한 영화들도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허>의 경우, 우리는 하나의 의도를 읽는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를 꼼꼼히 정리하는 것이 <허>에 대한 좋은 리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걸 잘 해낼 자신은 제로다. 그것이 곧 <허>가 가진 위대한 면모가 아닐까. 너무 잘 알겠는데, 잘 풀어낼 자신은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 ㅋㅋ(뻔한 변명인가?)
그래, 그 너무 잘 알겠지만, 잘 풀어낼 자신은 없는 그것에 대해 얘기해보자. 그건 어쨌거나 사랑에 대한 것이다. 사랑, 우린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모른다고 할수도 없다. 우리가 살면서 수차례 사랑에 대해 알 것 같다가도 수백번 사랑 앞에 무너진다. 이 모든, 단순한 것 같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것같지만 쉬운 것들이 <허>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좀 저속한 비유를 하자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온갖 공식이 담긴 전과같은 개념이다. 물론 답까지 제시하는 친절한 전과는 아니지만.
시어도어는 과거에 아름다운 사랑을 했던 남자였고, 현재는 그 과거의 아픔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있으며, 새로운 사랑이 어디서 불어닥칠지 모르는 무방비 상태에 있는 남자다. 나도 그렇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우리 모두는 (간단히 나누자면) 이 두 단계-사랑에 빠진 상태, 다른 사랑에 빠질 상태-중 어느 한가지 단계에 속해 있다. 그렇기때문에 이 영화를 너무도 잘 받아들일 수밖에,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의도를 읽을 수밖에 없는게 아닐까. 지난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후회, 아름다운 추억, 때론 슬픈 추억을 곱씹고, 그 사이에 다가오는 새로운 사람에 대한 경계, 또 다시 열게되는 마음과 그것이 결국 낳을 두려움, 그 속에서 틔워지지는 새로운 희망, 다시 영원할 것만 같은 행복감,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배신과 절망, 그것이 다시 후회와 추억으로 되감기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울타리. 우리는 이 과정들을 아무리 모른 척 하고싶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들을 읖어주는 영화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수많은 영화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어느정도를 다루냐의 차이일뿐, 다각도의 시선에서 사랑을 바라보고 각자의 의견과 해석을 영화를 통해 녹여낸다. 그런데 굳이. 왜. 유난히. <허>가 좋을까. 모든 영화감독이 하는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스파이크 존즈는 어디서 불어닥칠지 모르는 그 새로운 사랑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설정한다. 시어도어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이 바로 컴퓨터 운영체제(컴퓨터 용어 잘 모름) OS이다. 사람이 아니므니다. -일단, 여기서 두가지 생각이 드는데, (내 좁디좁은 시야에선 이정도의 덧생각이 전부다) 사람이 아닌 것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기존에, 동물이나, 사회 체제나, 신, 정도의 전례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들과 확연히 다른 것은, 이 OS를 통해서 시어도어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교감과 소통, 또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해낸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의 생각은, 이 OS를 사랑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이 시의성과 적확히 들어맞는다는 점이다. 관객들의 관심을 확 끌어당기기에 적절했다.-어쨌거나, 시어도어는 사만다(OS의 이름)와 썸도 타고,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한다.
이 단어를 진심으로 별로 쓰기 싫지만, 결국 '치유'의 문제다. 시어도어가 이 컴퓨터를 통해(ㅋㅋ저질스러운 표현) 사랑을 배운다는게 문제다. 사랑을 배운다? 정말 무책임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시어도어가 자신과 지난 사랑에 대해 반성하는 장면에서 폭발한다. 잃고 싶지 않았던 새로운 사랑을 또 떠나보내며, 죽을 만큼 힘들지만, 치유가 되어버린 시어도어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전 부인과 겪었던 수없는 다툼과 책임 회피, 도통 알 수 없었던, 알려고 들지 않았던 자신의 문제점들. 시어도어는 이것들에 대해 반성한다. 자신이 '사랑'을 하기 위해 어떤 것들이 부족하고 어떤 자세로 임해야하는 것인지를 배운다. 시어도어가 사랑에 있어서 이토록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며, 관객들은 동요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폭풍처럼 휘몰아친 사랑의 빈자리에 서 있는 시어도어는, 만신창이X만신창이가 아닌, 회복한, 건강한 모습으로 전 부인에게 편지를 남긴다. 연인이랑 헤어진 후 몇달동안 술을 퍼마시고 객기로 남기는 문자메세지랑 같다고 봐도 난 할말이 없다. 어쨌거나 지난 것에 대한 정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하니까. 하지만 <허>는 사랑 앞에서 성숙한 과정을 겪어내는 인물을 표현해냈다. 스파이크 존즈의 또라이 면모로, OS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을 교묘하게 밀어넣기는 했지만, 그가 하고싶었던 이야기는 결국엔, '우리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압시다'라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허>에 대한 경험은 무턱대고 제목에 눈이 홀려 집어 들었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난 후의 기분과 흡사하다.
네이버에 나와있는 영화 한줄 소개를 보면 의심부터 들기마련. 뭐? 컴퓨터 운영체제랑 사랑에 빠진다고? 헛웃음을 치며 <허>를 보기 시작할진 모른다. 하지만 <허>에는 그 어떤 영화에서 등장하는 '널 치유하겠다'하고 새로이 나타나는 그 어떤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보다도 훌륭하고 성숙한 대상이 등장한다, 그녀는 컴퓨터, 사만다. 사만다를 통해 사랑을 배우는 시어도어를 보며, 감독이 전하고 싶어하는 하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결국, 너무도 간단한 감상평이기 때문에 괜히 복잡한척 해보려고 발버둥을 쳐보긴 했지만, 영화를 통해 감독의 의도를 읽고 난 후, 그 메세지가 아무리 훌륭하고 좋다한들, 우리가 앞으로 사랑에 있어서 선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길은 수없이 많기때문에, 즉,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기때문에, 결코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는 단순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고, 명료한 대답을 내놓는 전과는 아니라고 표현한 것 또한 이런 연유를 통했던 것이다. 끝.
다음부턴 잘 쓰자 ㅜㅜ 허 미안...
We're only here briefly. And while I'm here, I wanna allow myself joy. So FUCK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