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의 영화, <가족의 탄생>
김태용 감독은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게 된 한 사연으로부터 이 영화가 시작된거라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안나지만, 사연의 핵심은 누가 누굴 집으로 데려오고, 또 누군 누굴 데려와서 남남이 함께 모여 한솥밥 먹고 지내게됐다는 어느 콩가루 집안 얘기였다. 그는 그 사연이 재밌어서 메모해두었고 어찌저찌 하다보니 이 영화가 탄생했다고 늘어놓았다. 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라디오 사연이 영화의 출발점이 됐다는 답변의 요지보다도, 그걸 영화로 (잘) 만들어낸 당신이란 사람이 얼마나 멋진가에 대해 더 큰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사소함에 대해 섬세하게 반응할 줄 안다는 것, 주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되 본인의 흥미와 맞닿는 이야기를 구분하고,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 시간이 흘러 그것을 다시 꺼낼 수 있다는 것, 그것에 애정을 쏟는다는 것, 꾸준히. 이게 아무(영화 감독)에게나 가능하지 않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변함이 없다. 내가 봤던 그날의 김태용은 그런 이야기꾼이였고, 그런 사람의 애정을 오래전부터 듬뿍 받아왔던 결과물이라는 게 팍팍 티나는 영화가 <가족의 탄생>이였다.
그 이후 꽤 오랜만에 다시 본 <가족의 탄생>은 여전히 빛나더라. 촬영이나 조명에서 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제작비에 허덕였을게 훤히 보이는 장면들도 있고, 정제되지 않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와, 그걸 더 다듬어주지 못한 감독의 정신없음(?)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 나름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 이후에 이 영화보다 좋은 한국영화가 무엇이 있었는지, 있긴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요즘 <보이후드> 후폭풍때문인진 몰라도 뭘 보기만하면 '세월' 타령을 하게되는데, <가족의 탄생>을 다시 보며 그런 맥락을 표현한 부분들이 많이 와닿았다. 동생 형철(엄태웅)이 버린 어머니벌 되는 아내-무신(고두심)과 수십년간 한솥밥 먹고 살기까지 벌였을 미라(문소리)의 노력들, 평생 죽도록 싫었던 엄마에 대해 '엄마는 따뜻한 분이였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딸 선경(공효진)이 흘렸을 눈물들. '아이스크림 사올게 100만 세'하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무책임한 형철(엄태웅)을 비롯한 자기를 버리려고했던 모든 사람들 틈에서, 그 누구보다도 예쁘게 자란 '채현'이라는 인물 자체가 상징하는 세월의 흔적. 물론 비슷한 맥락에서 경석(봉태규)도 마찬가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밥상씬은 여전히 커다래 보였다. 채현이의 엄마들, 미라(문소리), 무신(고두심), 채현(정유미), 경석(봉태규)가 함께 밥상에 둘러 앉아 무신의 생일밥을 먹는 장면. 밥상에 앉은 네 사람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건만, 머리를 맞대고 도란도란 밥을 먹고있다. 밥 한숟갈 뜰때마다 나는 달그락 달그락 소리와 '한그릇 더 줘', '꾹꾹 눌러 담아라'같은 다정한 말들이 오고가는 한 가족의 '밥상'으로 가족의 탄생을 알린다. 맨 처음 라디오에서 들은 사소한 사연에 대한 이미지를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장식하기까지 이야기꾼으로서의 김태용과 그의 섬세함이 통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엔 채현(정유미)의 헤픔을 어느 구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경석(봉태규)이 이 아이의 헤픔은 헤픔이 아닌 정(사랑)이였다는 깨닫음을 묘사한 컷트가 있다. 채현에 대한 오랜 오해눈녹듯 풀리는 순간을 경석의 작은 미소에 담아냈더라. 거기서 눈물이 왈칵 났다, 연출이 너무 이뻐서. 이 감성을 어쩔것이냐. 이후 나도 모르게 이 복작복작하고 온기 넘치는 마루에서 그동안 채현이 받았을 사랑과 정을 가늠하기 힘들어지기도 했다.
전체적인 구조에서도 그 섬세함은 드러난다. 똑바로 자르면 하나의 단편영화로서도 제 기능 할 것만같은 세가지 에피소드들이 근사하게 엮여있다. 다시봐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솔직히 몇몇 장면들(특히 공효진이 공중부양하는 환타지 씬)에선 웃음이 좀 나기도 했습니다. 웬만한 확신없인 그런 장면을 넣을 수가 없는건데. 그래서 더 감독의 애정이 느껴졌다고 하면 엄청난 합리화일런지. 그래도 어린 채현이 마당에서 뛰노는 모습을 배경으로 미라와 무신이 마주보고 밥먹는 환타지 장면은 내가 <가족의 탄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그 장면 너무 좋았어요!!!!"라고 바로 앞에 앉아있는 감독에게 손 번쩍 들고 (일방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7년전 콩닥거림이 아직 생생할 정도로.
평범해보이지 않는, 하지만 가장 따뜻한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 이시대 가족의 의미에 대해 촌철살인의 질문을 던지기도, 누군가에겐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했던 영화. 나와 함께하고, 나의 인생을 나누고, 당신의 인생을 나눠갖는, 함께 아침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의미를 생각케했다. 지저분하게 끌고갈 수도 있는 최적의 소재를, 치정극의 틀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과감하게 드러내버리는 전개가 참 새롭게 다가왔던 <가족의 탄생>. 이러고 몇년 후 <만추>봤을때의 후덜거림은 또 잊을 수 없는 경험이였다. 그리고선 다짐. 앞으로 김태용이 뭘 들고 나와도 꿋꿋하게 응원하겠다고.(내 취향이니까) 우리에게 날렸던 그 미소를 머금은채 시나리오를 써내려갈것만 같은 부질없는 환상과 함께.